자취 후라이팬, 냄비 구입 가이드

후라이팬

요즘 대부분의 원룸에 들어가는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는 2구짜리는 지름 18cm짜리 대버너와 지름 14.6cm짜리 소버너가 하나씩 있고, 1구짜리는 지름 18cm짜리 대버너만 있다. 대버너에는 24cm 후라이팬이, 소버너에는 20cm 후라이팬이 사이즈가 딱 맞는다. 버너 지름보다 후라이팬 지름이 커 보이는 이유는, 대부분의 후라이팬·냄비는 아래쪽보다 위쪽이 넓은 구조로 되어 있어 바닥 지름보다 입구 지름이 큰데, 후라이팬·냄비의 지름은 입구 지름을 기준으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라이팬은 1구짜리 하이라이트 사용자라면 24cm, 2구짜리 하이라이트 사용자라면 24cm과 20cm을 각각 하나씩 구입하는 것이 좋다. 20cm짜리는 계란후라이, 스크램블, 해시브라운, 스팸구이 같은 용도로 쓸 수 있다. 크기가 작아서 기름을 적게 둘러도 기름높이가 어느 정도 올라오기 때문에 소용량의 요리를 할 땐 작은 후라이팬을 쓰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24cm짜리 하나로 전부 해결하지 않고 굳이 20cm짜리도 추가로 구입하는 것이다.

코팅팬과 스텐팬 중에는 코팅팬을 우선적으로 구입해야 한다. 스텐팬도 나름대로 좋은 물건이지만 스크램블에그 등 일부 음식의 조리가 어렵기 때문에, 코팅팬 없이 스텐팬만 단독으로 가지고 주방을 꾸려나가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스텐팬은 일단 코팅팬을 갖춰 놓은 사람이 추가로 구입해서 사용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후라이팬 코팅은 크게 테플론 코팅과 세라믹 코팅으로 나뉜다. 테플론 코팅은 우리가 익히 보는 검은색 코팅으로, 여러 겹의 코팅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레이어가 PTFE를 주된 성분으로 한다. 테플론 코팅을 할 땐 코팅 내구도 향상을 위해 먼저 후라이팬 본체에 마블, 다이아몬드 등 경도가 높은 재질의 가루를 뿌리거나 티타늄을 입히고 그 위로 PTFE 레이어를 올리는데, 이렇게 PTFE 레이어 아래쪽에 깔려 있는 가루재질의 성분에 따라 마블코팅, 다이아몬드코팅, 티타늄코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것들도 결국 맨 위쪽에 있는 레이어는 PTFE가 주성분이므로 일반 불소코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특히 인체 유해성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테플론 코팅 중에서는 테플론 개발사인 미국 Chemours사의 Teflon® 브랜드 코팅을 선호하는 편이다. 중소기업에서 자체개발한 정체불명의 무슨무슨 코팅보다는 이런 대기업에서 인증한 코팅이 수명이 길고, 인체 유해성도 최소한 중소기업보다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에서다. PTFE 자체는 250°C 이하에서는 유해성이 없지만, 코팅의 바깥쪽 레이어가 100% PTFE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업체 나름대로 내구도 향상 또는 원가 절감을 위해 다른 원료를 섞을 수 있는데 그 다른 원료가 건강에 어떨지는 모르니까. Teflon® 코팅이 적용된 후라이팬 브랜드의 예로는 IKEA, Tramontina를 들 수 있다.

세라믹 코팅은 각종 실록산(Si–O–Si) 등을 주성분으로 하는 형형색색의 코팅으로, 자동차 도장으로 하는 ‘유리막 코팅’과 원리가 비슷하다. 세라믹 코팅에도 코팅력 향상을 위해 PTFE를 첨가하는 것이 가능하나(Wu & Németh, 2004), 대부분의 경우에는 PTFE는 넣지 않는다.

세라믹 코팅의 장점으로는 ① 테플론과 달리 경도가 높아서 금속 조리도구를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점, ② 딱 봐도 뭔가 화학적이고 건강에 해로울 것처럼 느껴지는 무광 검정색의 테플론 코팅과 달리 세라믹 코팅은 맨들맨들하고 예쁜 색상이라 왠지 건강에도, 환경에도 좋을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세라믹 코팅이 PTFE보다 ‘실제로’ 건강에 좋은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세상에 유해물질이 PTFE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라믹 코팅에 PTFE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라믹 코팅이 그 나름대로 새로운 유해성분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세라믹 코팅의 최대 단점은 코팅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사용 전에 식용유로 길들이기를 하고, 조리 직후 차가운 수돗물에 담그는 등 급격한 온도변화를 주는 행위를 금하는 등 애지중지 사용하면 1년은 쓸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어렵다. 물론 사용빈도가 낮으면 그보다 오래 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동일한 사용조건 하에서 PTFE 코팅팬보다 수명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유럽에서 제조된 고가의 세라믹 코팅 후라이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실 세라믹 코팅이 PTFE보다 환경에 더 좋다고 보기도 어렵다. 수명이 짧은 만큼 후라이팬을 더 자주 버리고 재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품은, 만약 스텐팬 없이 코팅팬만 단독으로 운용할 거라면 IKEA 365+ 24cm 후라이팬(25,000원)이 가성비가 좋을 거라고 본다. 코팅이 테플론 최상위등급 코팅인 Teflon® Professional이어서 튼튼한 편이고, 바닥이 두꺼워서 휘거나 볼록해지지 않는다.

스텐팬 사용자에게는 네오플램에서 ‘수출잔량OEM’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세라믹코팅 후라이팬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가격은 20cm, 24cm 공통으로 개당 11,000원 정도다. 이것도 바닥이 두꺼워서 오래 써도 밑판이 볼록해지지 않는다. 테플론코팅과 달리 금속 조리도구를 써도 코팅수명이 유의미하게 짧아지지 않기 때문에 코팅팬을 위한 별도의 플라스틱 조리도구를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단점은 코팅수명이 짧다는 것이나, 대부분의 요리를 스텐팬으로 하고 코팅팬은 가끔씩만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코팅 수명이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다이소 후라이팬은 얇아서 그런지 조금만 써도 밑판이 많이 볼록해지므로 전기렌지 사용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코팅 내구성도 그리 좋지 못하다.

스텐팬

집에서 음식을 자주 해먹는 사람이라면 스텐팬도 하나 구비하는 것이 좋다. 코팅팬은 쓰면 쓸수록 코팅 내구도가 깎이지만 스텐팬은 그렇지 않으므로, 코팅력이 필요하지 않은 음식을 할 땐 스텐팬을 이용하면 장기적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또한 고온에서 조리해야 하는 음식을 할 때도 스텐팬이 어울린다. 코팅팬은 고온으로 예열하기 부담스럽고 예열을 하더라도 열용량이 낮아 금방 식어 버리지만, 스텐팬은 부담없이 예열할 수 있고 온도 유지력도 좋기 때문이다. 건강…에의 영향은 아직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코팅팬이 건강에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텐팬은 크게 바닥3중과 통3중으로 나뉜다. 바닥3중은 후라이팬 본체 밑에 바닥 부분에만 알루미늄-스텐 디스크를 붙여 놓은 것을 말하고, 통3중은 후라이팬 바닥은 물론 옆면까지 통째로 스텐-알루미늄-스텐 구조로 된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은 바닥3중은 저급이고 통3중은 고급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명품 주방용품 브랜드인 드메이어Demeyere에서 나온 30만원짜리 냄비가 바닥3중으로 돼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통3중, 바닥3중을 기준으로 고급, 저급을 나누는 것은 그리 변별력이 뛰어난 기준은 아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바닥3중의 장점은 같은 밑판 두께에서 무게가 가벼워지고, 예열시간이 단축되며, 전기렌지에서 사용시 옆면이 상대적으로 차갑게 유지되기 때문에 식용유가 후라이팬 옆면 가장자리에 눌어붙는 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라이팬이 아닌 냄비인 경우, 얇은 옆면으로 음식물의 열기가 쉽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라면처럼 빨리 식히고 싶은 음식을 조리하는 냄비로 쓰기에도 좋다. 바닥3중의 단점으로는, 우선 옆면이 상대적으로 차갑게 유지되기 때문에 삼겹살 구울 때 옆면을 조리면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가스렌지에서 사용시 가스불의 열기로 인해 달궈진 옆면의 열이 알루미늄을 통해 전도돼 음식물과 접촉해 있는 밑판으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옆면이 과열된다는 단점도 있다. 이 때문에 가스렌지에서 바닥3중을 사용하면 옆면에 음식물과 식용유가 잘 눌어붙는다.

일반적으로는 IH 인덕션에는 열분포 이슈 때문에 바닥면 알루미늄의 두께가 두꺼운 바닥3중을, 가스렌지에는 옆면 눌어붙음 현상 때문에 통3중을 추천하는 편이다. 하이라이트 전기렌지 사용자는 본인 취향에 따라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다.

3중이 아닌 통5중, 통7중 제품도 있다. 통3중과 통n중 간에 기술적인 차이는 없다. 통3중은 스텐-알루미늄-스텐 구조이고, 통5중은 스텐-알루미늄-알루미늄-알루미늄-스텐 구조인데, 만약 통3중에서 알루미늄층의 두께가 1.5mm이고 통5중에서 알루미늄층 하나의 두께가 0.5mm이라고 한다면 통3중이든 통5중이든 결국은 스텐-1.5mm알루미늄-스텐의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n중 숫자가 아니라 알루미늄층의 총 두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제조사들은 저급라인은 3중으로 만들고 고급라인은 5중, 7중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사실 기술적으로는 n중 숫자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한 제조사의 제품 내에서는 3중제품보다는 5중, 7중제품이 더 고급이 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승용차에 아반떼라는 이름을 붙이는지 제네시스라는 이름을 붙이는지에 따라 차의 공학적인 성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아반떼보다 제네시스가 성능이 좋다. 제조사가 애초부터 더 성능 좋게 만든 차에 제네시스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통n중도 마찬가지로, 같은 제조사 제품이라면 통3중보다는 통5중이 더 좋을 가능성이 높다. 단, 서로 다른 제조사 간에는 통n중 숫자를 통한 품질 비교가 불가능하다. 드메이어의 통3중 스텐팬이 롯데마트 PB상품 통5중 스텐팬보다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BMW 3시리즈보다 르노삼성 SM5가 숫자가 더 크므로 SM5가 더 고급차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알루미늄층의 두께도 꼭 두꺼울수록 고급이라고 단순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루미늄이 두꺼워질수록 바닥면 전체에 열이 고르게 분산되는 성질이 강해지고, 축열량이 늘어나 식재료 투입시 팬 온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덜하지만 그만큼 화력 조절시 팬의 반응속도도 더디고 예열시간 및 물 끓는 시간이 길어지며, 팬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장단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다만 IH 인덕션 사용자에게는 두꺼운 바닥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덕션은 바닥면에 고르게 열이 가해지지 않고 좁은 O자모양으로 열이 집중되는 성질이 있어서* 이를 조금이라도 상쇄하려면 알루미늄이 두꺼워 열전도를 잘 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덕션 및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는 화력조절을 할 때 화력 자체를 낮추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ON/OFF라는 2가지 상태만을 가지고 그걸 껐다 켰다 하는 시간을 통해 화력을 조절하기 때문에, 화력변화에 민감한 얇은 팬을 사용하면 코일이 꺼졌다 켜졌다 할 때마다 음식이 식었다 탔다를 반복한다. 두꺼운 팬을 사용하면 이러한 단점이 좀 상쇄된다.

통5중, 통7중 중앙에 구리가 들어간 일명 코퍼코어copper core 후라이팬은 쓸모가 없다. 코퍼코어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구리가 알루미늄보다 열전도율이 70% 높기 때문에 코퍼코어를 사용하면 후라이팬 바닥 전체로 열이 고르게 분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열 분산 성능은 ‘재질의 열전도율 × 재질의 두께’에 비례한다. 구리가 알루미늄보다 열전도율이 70% 높다고 해도, 알루미늄층의 두께를 구리층보다 70% 두껍게 만들면 열 분산 성능은 같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후라이팬 바닥의 두께를 무한정 두껍게 만들 수 없는 이유는, 바닥이 두꺼울수록 팬이 무거워져 사람이 다루기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리의 밀도는 8.96 g/cm³, 알루미늄의 밀도는 2.70 g/cm³이므로, 열 분산 성능이 동일한 구리팬과 알루미늄팬을 비교하면 구리팬이 알루미늄팬보다 2배 정도 더 무겁다. 즉, 구리팬은 알루미늄팬보다 가격 대 성능비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 대 성능비도 떨어진다. 고가의 명품 후라이팬 제조사들도 구리 대신 알루미늄으로 후라이팬을 만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텐팬을 처음 쓰는 사람들은, 본인에게 스텐팬이 맞을지 안 맞을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 저렴한 걸로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모든 후라이팬이 다 마찬가지지만 스텐팬도 저렴한 제품은 통3중 바닥3중을 불문하고, 그리고 조리 후 뜨거운 상태에서 물에 넣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쓰다 보면 바닥이 휘어져 볼록해지는 현상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나는 스텐팬을 처음 쓰는 사람이라도 처음부터 고급제품으로 구입할 것을 권한다.

전기렌지 사용자에게 가장 무난한 제품은 이케아 Sensuell 24cm 통3중 후라이팬(5만원)이다. 두꺼워서 바닥이 거의 휘지 않으며, 바닥의 평평함에 대해 25년 보증이 들어가 있다. 단점은 두께 때문에 무게가 거의 무쇠팬 수준으로 무거워서 손목이 좀 아프다는 점과, 손잡이가 리벳방식이라는 점이다. 손잡이는 이 무게를 버티려면 부득이 리벳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스렌지 사용자에게는 한일 헤르만 24cm 통5중 후라이팬(5만원)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 멋있고, 손잡이 용접방식에, 무게감도 적당하다. 사용환경에 따라 바닥이 휘어 볼록해지는 현상이 쉽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흠이지만 가스렌지를 쓴다면 바닥이 휘어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냄비

냄비는 라면용 작은 편수냄비 1개와 다목적용 큰 양수냄비 1개를 구비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편수냄비는 긴 손잡이가 하나 달린 냄비를 말하고, 양수냄비는 짧은 손잡이가 양쪽에 하나씩 총 2개 달린 냄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양수보다는 편수가 쓰기 편하지만, 큰 냄비는 편수로 만들면 냄비+음식물 무게를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수로 생산한다.

자취를 처음 하는 사람들은 굳이 냄비를 2개씩이나 살 필요 없이, 적당한 크기의 냄비 하나만 사서 그걸로 라면도 끓여 먹고 이것저것 다 하겠다는 미니멀리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냄비는 웬만하면 하나 갖춰 두는 것이 좋다. 작은 냄비는 그 자체로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이즈이기 때문에 라면, 찌개 따위를 냄비째로 올려놓고 먹기가 편하다. 또한 작은 냄비는 튀김요리를 할 때 기름을 적게 넣어도 높이 올라오기 때문에 기름낭비가 적다는 장점도 있다. 사실 주방 도구는 뭐든지 종류별로 이것저것 갖춰 놓을수록 편하다. 미니멀리즘에 과도하게 집착해 도구 갯수를 줄이면 주방일이 불편해져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빈도가 늘어날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주방도, 지갑도 미니멀해지므로 ‘미니멀리즘’이라는 목적 자체는 훌륭하게 달성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라면용 작은 편수냄비는 3중바닥 스텐 재질인 IKEA 365+ 1L 소스팬(15,000원)이 가성비가 좋다고 본다. 라면 1인분, 찌개 2인분 끓이기에 최적화된 사이즈다. 심플하면서도 멋진 디자인, 음식이 잘 눌어붙지 않는 두꺼운 3중바닥, 바닥의 평평함 유지력에 대한 15년 보증, 스텐 테두리 없이 유리 일체형으로 이루어져 위생적인 내열유리 뚜껑, 세척이 편리한 용접방식 손잡이, 국물이 냄비 벽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게 해 주는 푸어링 림, 통3중이 아니라 옆면은 얇은 스텐으로만 돼 있어서 라면이 빨리 식는 점 등 장점이 많다(꼭 통3중이라고 좋은 게 아니다). 단점은 냄비뚜껑 안쪽으로 물이 조금 새어들어가 미관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IKEA 365+의 내면 재질은 430 스텐이나, 이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텐’이라는 것은 철에 크롬, 니켈 등 다른 금속을 넣어 만든 합금으로, 정확히 어떤 금속을 얼마나 많이 넣었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주방용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스텐은 304와 430이다. 304는 철에 크롬 18%, 니켈 8% 정도가 섞여 있는 합금으로(기타 자잘한 성분 또는 불순물들은 제외), 27종, 18/8, 18/10이라고도 불린다. 430은 철에 크롬만 18% 정도가 섞여 있고 니켈은 아예 포함돼 있지 않거나 아주 적은 양만 들어 있는 합금으로, 24종, 18/0이라고도 불린다. 니켈은 가격이 철의 200배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비싼 금속이어서 스텐의 가격도 니켈이 들어간 304가 그렇지 않은 430보다 훨씬 비싸다.

주방용품에 비싼 304 스텐을 쓰는 이유는 녹 발생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다. 430도 녹이 잘 생기는 편은 아니지만(IKEA 365+ 소스팬에 녹이 생기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 304는 녹에 대한 저항력이 더 강하다. 그 외에 304가 430보다 우월한 점은 없다. 인터넷에서 주부 커뮤니티, 캠핑 매니아 커뮤니티 같은 데를 둘러보면, 430은 저급 스텐이고 304는 고급 의료용(?) 스텐이기 때문에 430에서는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나오지만 304는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다. 스텐의 주 구성성분인 철, 크롬, 니켈 중 인체에 가장 유해한 것은 니켈이다. 굳이 따지자면, 중금속인 니켈이 미량씩 용출돼 나오는 304스텐(Kamerud et al., 2013)보다 그런 유해물질이 안 들어있는 430스텐이 더 안전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목적용 큰 양수냄비는 유리 재질인 루미낙 양수 2L 투명갈색(25,000원)을 추천한다. 하이라이트 대버너에 딱 맞는 크기로, 파스타 삶을 때 길다란 스파게티 건면도 구부리면 들어가고, 카레도 6인분까지 끓일 수 있고, 필요시 라면 1인분을 끓여 냄비째로 먹기에도 크게 어색하지 않고, 가정용 20L 용량의 전자렌지에도 뚜껑 덮은 채로 쉽게 들어가고, 지름 20cm짜리 후라이팬을 사용하는 경우 이 냄비의 뚜껑을 후라이팬 뚜껑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등 범용성이 뛰어나다. 찜기류 최강자인 루미낙 유리찜기(15,000원)와 완벽하게 호환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찜요리를 하고 나면 그 꽃봉오리처럼 폈다 오므렸다 하는 찜기 설거지하기가 너무 귀찮아서 찜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고정식 일체형으로 나오는 찜기는 설거지가 간편해서 부담 없이 만두찜을 해먹을 수 있다. 재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두피가 찜기에 잘 달라붙지도 않는다. 필요시 국수 삶고 물기 빼는 체로 사용할 수 있어 범용성도 높다. 루미낙 양수냄비 2L, 3L짜리가 이 찜기와 호환된다.

의외로 유리재질의 냄비는 자취족의 생활패턴과 잘 맞는 측면이 있다. 유리냄비는 스텐과 달리 김치찌개 같은 산성 음식을 장기보관해도 되기 때문에 찌개를 2인분 끓였다가 1인분만 먹고 남은 것은 다른 그릇에 옮겨담을 필요 없이 냄비째로 냉장고로 직행시킬 수 있다. 녹이 슬지도 않기 때문에 냄비를 축축한 싱크대에 한 달간 방치해도 안심이다. 뚜껑도 나사홈 없이 매끈한 일체형으로 돼 있기 때문에 냄비뚜껑에 라면 덜어먹고 나서 설거지도 완벽하게 된다. 금속재질이 아니어서 냉장고에 있는 남은 찌개를 냄비째로 전자렌지에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를 쓰는 경우에는 유리냄비가 물도 빨리 끓는다. 원래 유리냄비는 재질 자체가 열전도율이 낮은데다가 두께도 두꺼워서 열관류율이 낮아, 가스렌지 같은 전도conduction 위주의 가열기구에서 사용할 땐 물이 늦게 끓는 단점이 있다. 실측 결과 통3중 스텐냄비보다 15% 늦는다. 그런데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는 빨갛게 달궈진 코일이 적외선을 내뿜고, 그 적외선이 냄비와 음식물을 달구는 복사radiation 위주의 가열기구다. 스텐과 같은 금속냄비는 하이라이트에서 나오는 적외선을 투과시키지도 흡수하지도 않고 그대로 반사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이라이트에서는 열효율이 다소 떨어지지만, 유리냄비는 적외선을 투과시켜 음식물로 직접 전해지게 하거나(수분은 적외선을 흡수한다) 적외선을 흡수하여 자기 자신을 달구는 경향이 있어 하이라이트에서 열효율이 높다. 실측결과 하이라이트에서는 유리냄비, 통3중 스텐냄비, 양은냄비 모두 끓는 시간이 비슷했다.

다만 세라믹유리는 스텐보다 급격한 온도변화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신경써 줘야 할 것들이 있다. ○찌개를 끓이다가 물을 추가할 땐 물을 한꺼번에 부으면 새로 들어간 찬물이 통째로 바닥에 깔리면서 바닥 유리 안쪽과 바깥쪽 간 온도차이가 너무 커질 수 있으므로, 물이 들어가면서 기존의 뜨거운 물과 섞일 수 있도록 주걱으로 휘저으면서 조금씩 천천히 넣는 것이 좋다. ○조리 직후 뜨거운 상태의 유리냄비를 차가운 물이 묻어 있는 주방상판에 올려놓으면 열충격이 가해질 수 있으므로, 열전도율이 낮은 전기렌지 상판, 가스렌지 그릴, 침대 위의 이불, 냄비받침 따위에 올려놓는 것이 좋다. ○유리냄비 제조사들은 열충격으로 인한 파손에 대해 구입 후 10년까지 보증하는데, 이는 구입 후 10년이 지나면 열충격으로 인한 파손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일 수 있으므로 10년 쓴 유리냄비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사용빈도에 따라서는 버리고 새걸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한다. ○유리냄비에 고기를 볶다가 물을 추가하는 식으로 찌개를 끓이는 경우, 찬물을 바로 부으면 열충격이 가해질 수 있으므로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서 넣어야 한다. 아니면 고기는 후라이팬으로 볶거나..

새 유리냄비에서는 돌비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유리냄비는 냄비 안쪽 표면이 굉장히 매끈하기 때문에, 물의 온도가 100°C가 돼도 물이 끓지 못하고 100°C 이상으로 온도가 올라가 버릴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라면스프 같은 자잘한 가루를 투입하거나, 사람이 손으로 냄비를 들어 올림으로써 물을 흔들리게 만들면, 그간 끓지 못하고 쌓였던 게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끓어 넘친다.* 단순히 물이 끓어넘치는 것일 뿐이므로 이로 인해 냄비가 깨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냄비를 손으로 잡고 있었던 경우 끓는 물이 튀어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물이 끓기 전에 미리 라면스프를 넣어 둬야 한다.

또한 유리냄비는 뚝배기만큼은 아니지만 스텐냄비와 비교하면 열관류율이 낮고 축열량이 커서 음식의 온기를 오래 보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라면처럼 빨리 식어야 먹기 편한 음식을 냄비째로 먹을 땐 약간 불편할 수 있다.

루미낙 유리냄비는 불투명흰색과 투명갈색의 2가지 색상으로 나오는데, 이게 정확히 같은 재질에 색깔만 다른 것은 아니고 재질 자체가 약간 다르다. 불투명흰색은 Pyroceram, 투명갈색은 Calexium이라고 부른다. 내가 써 본 바로는 불투명흰색보다 투명갈색이 사용성이 좋다. 불투명흰색은 다공성porosity이 있어서 카레 같은 것을 조리하면 착색이 되고(계속 쓰다 보면 다시 색이 빠지긴 한다), 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뜨겁게 달궈진 상태에서 스텐 수저를 마찰시키면 스텐이 갈려나와 회색 선 형태로 묻는다(계속 쓰다 보면 음식에 섞여들어가서인지 없어지긴 한다). 투명갈색 냄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루미낙과 유사한 비젼Visions 브랜드의 유리냄비는 몸체 부분은 루미낙 제조사인 프랑스 Arc International에서 OEM으로 생산한다. 내열성능 등은 루미낙 유리냄비와 같다.


그런데 간혹 유리냄비에 유해물질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분들은 대개, 순수한 소다석회유리는 안전한 재질이지만, 붕규산유리라고도 불리는 내열유리 또는 비젼 등 세라믹 글라스 유리냄비는 순수 소다석회유리가 아니라 내열성을 얻기 위해 플라스틱 또는 그 밖의 첨가물을 넣은 합성 유리이기 때문에 그 첨가물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분들은 그런 합성유리 재질의 유리냄비보다는 오히려 순수 스텐 재질의 냄비가 인체에 더 무해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우선 ‘순수한 소다석회유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다석회유리는 그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유리의 주성분인 규소(SiO₂)의 녹는점을 낮추기 위해 소다, 석회 및 그 밖의 불순물을 섞어서 만든 유리다. 녹는점을 낮추는 이유는, 유리는 일단 녹여서 액체상태로 만들어야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을 할 수 있는데, 녹는점이 높을수록 유리를 녹이기 위해 더 높은 온도가 필요하고 온도를 높이려면 연료를 더 많이 투입해야 하므로 생산원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 생산원가의 상승폭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소다, 석회를 섞지 않고 순수한 규소로만 만든 유리를 ‘석영유리’라고 부르는데, 이 석영유리 재질로 된 500mL짜리 비커는 1개에 21만원이다. 같은 브랜드로 나오는 붕규산 내열유리 재질(이것도 소다석회유리와 비교하면 훨씬 비싼 재질이다)의 500mL 비커가 1개에 3천원인 것과 비교하면 실로 압도적인 가격이다. 참고로 석영유리 재질로 주방용 그릇·냄비를 제조하는 회사는 아직 없다.

유리냄비에 플라스틱 합성수지 재질이 들어간다는 주장도 잘못됐다. 플라스틱은 고분자 유기화합물로서 탄소(C) 및 수소(H) 위주로 이루어진 물질이므로, 만약 유리냄비에 플라스틱이 섞였다면 유리냄비 재질의 구성성분에 C, H가 상당량 포함돼 있어야 할 것이다. 유리냄비의 재질은 정확한 모델명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Pyroceram의 일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시 Pyroceram의 일종인 Pyroceram 9606은 SiO₂ 56%, Al₂O₃ 20%, MgO 14%, TiO₂ 9%, K₂O 0.05%, As₂O₃ 0.2%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Salmon & Tye, 2010). 산화비소(As₂O₃) 등 일부 눈에 밟히는 성분이 보이기는 하나, 일단 Pyroceram이 유리에 플라스틱을 섞어서 만든 재질이라는 주장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Pyroceram 9606이 아닌 실제 미국제프랑스제 비젼 유리냄비 몸체를 대상으로 한 측정에서는 As가 검출되지 않았다.)

유리냄비가 위험하므로 그 대안으로 스텐냄비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유리보다는 스텐이 재질이 용출되는 정도가 심한 편이다. 304 스텐을 70°C 온도의 0.5% 구연산 수용액에 넣었을 때 우러나는 속도와 Schott 붕규산 내열유리를 108°C로 끓는 20% 염산 수용액에 넣었을 때 우러나는 속도가 비슷하다. 스텐이 유리보다 안전하다고 하려면, 이러한 용출속도의 차이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스텐이 유리보다 유해물질 함량이 적어야 할 것인데, 유리의 유해물질 함량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해 봤을 때 꼭 스텐이 유리보다 유해물질이 현저히 적게 들어 있을 거라고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리냄비의 유해성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냄비 재질에 따라 인체에 어쩌면 유해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물질이 0.00000000001만큼 더 용출될 수도 있니 없니를 따질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기타 냄비 관련 이것저것.

양은냄비는 알루미늄 겉면에 얇은 산화피막을 입히고 때로는 염료를 사용해 금색을 낸 냄비로, 결국은 그냥 알루미늄 냄비다. 가스렌지 사용환경에서는 양은냄비도 쓸모가 있지만, 현재 원룸가의 대세가 된 하이라이트 전기렌지 사용환경에서는 양은냄비는 쓸모가 없다. 알루미늄이 열팽창계수가 높은 재질이라 밑면이 금방 휘어져 볼록해지기 때문이다. 전기렌지에 이런 걸 올려놓으면 밑면을 중심으로 팽이처럼 빙글빙글 돈다..

양은냄비의 상위호환은 다이소 5천원짜리 스텐냄비로, 17.8cm 양수, 20cm 양수, 17.5cm 편수 버전이 존재한다. 실제 사용해 본 결과 양은냄비와 물 끓는 속도 및 화력조절에의 반응속도 모두 동일하다. 양은냄비와 달리 바닥이 볼록해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참고로 하이라이트 전기렌지 풀파워 기준으로 물 끓는 속도는 유리냄비보다 10초 빠르다. 8분 vs 8분 10초…

코팅냄비는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코팅 후라이팬과 마찬가지로 코팅 수명이 다함에 따라 1~2년 주기로 계속 새 제품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가성비가 떨어진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소위 ‘세라믹코팅’ 냄비도 마찬가지로, 세라믹코팅은 일반 불소코팅보다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주 교체해 줘야 한다. 애초에 냄비로 하는 음식 중에 바닥에 달라붙는 요리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란찜을 하면 달라붙긴 하지만, 계란찜 달라붙은 것은 냄비에 베이킹소다를 조금 넣고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가득 부어준 다음 몇 시간 기다렸다가 살살 밀면 다 떨어져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란찜은 코팅냄비로 해도 달라붙는다(…)

파스타 삶는 전용 냄비는 필요하지 않다. 파스타 냄비가 필요하다는 분들은 ① 100°C로 끓는 물에 파스타를 넣으면 물의 온도가 100°C 미만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냄비에서 끓고 있는 물의 양이 적을수록 이 때 온도가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파스타가 꼬들꼬들하게 익지 못하고 흐물흐물해지며, ② 물의 양이 적을수록 파스타에서 나온 전분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지들끼리 서로 달라붙어 버리므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파스타는 큰 냄비에 많은 양의 물을 넣고 삶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미 실험결과로 반박됐다. 건파스타는 파스타가 적당히 잠길 정도의 물에 넣고 삶으면 충분하며, 물의 온도 또한 82°C만 넘으면 충분하다(López-Alt, 2010).

인덕션용 냄비, 후라이팬?

요즘 대부분의 원룸에는 가스렌지가 아닌 전기렌지가 들어가 있다. 전기렌지는 크게 하이라이트와 인덕션으로 나뉘는데, 하이라이트는 전원을 켜면 화구 밑의 코일 열선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위쪽으로 강한 복사열을 내뿜는 것을 말하고, 인덕션은 전원을 켜도 화구 자체가 달아오르거나 뜨거워지는 것 없이 화구 위에 있는 냄비만 유도가열되는 것을 말한다.

인덕션은 우리나라에서는 IH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IH는 induction heating의 약자로, 영어는 아니고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유도가열이 아닌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도 편의상 그냥 ‘인덕션’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홍보물에 ‘인덕션’이라고 강조해 놓으면 그게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라는 건지 IH 전기렌지라는 건지 소비자가 알 수가 없다. 이에 업계에서는 유도가열 방식의 렌지를 확실하게 구분 표시하기 위해 일본의 IH라는 단어를 들여 와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하이라이트’도 한국에서만 쓰는 표현이다.)

원룸에 옵션으로 들어가는 전기렌지는 대부분 하이라이트이고, 인덕션이 설치돼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이는 양은냄비나 알루미늄 후라이팬을 즐겨 쓰는 자취족들의 특성상 인덕션을 들여 놓으면 호환성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인덕션은 자석에 붙지 않는 재질인 알루미늄, 304 스텐, 20x 스텐, 유리, 뚝배기 등은 가열할 수 없고, 자석에 붙는 재질인 430 스텐, 무쇠, 법랑만 가열할 수 있다. 법랑은 무쇠 겉면을 도자기 재질로 코팅한 것을 말한다.

인덕션이 꼭 하이라이트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전기렌지는 무조건 인덕션이 좋고 하이라이트는 인덕션의 열화판에 불과하며, 원룸 옵션으로 인덕션이 아닌 하이라이트가 들어가는 이유는 건물주가 돈을 아끼려고 싼 걸 넣어서 그렇다는 말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꼭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고 각기 장단점이 있다.

인덕션의 장점은 물이 빨리 끓는다는 것이다. 인덕션과 하이라이트는 제품 규격의 와트(W) 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대 화력 자체는 동일하나, 인덕션은 전원을 켰을 때부터 최대화력이 나오기 시작하는 반면 하이라이트는 열선과 주변 유리가 데워질 때까지 수 분에 걸쳐 화력이 서서히 증가하기 때문에 물 끓는 속도가 인덕션이 훨씬 빠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를 쓰더라도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서 냄비에 부어 주는 식으로 하면 이 단점은 쉽게 상쇄 가능하다. 끓이려는 물을 한 4/5 정도는 전기포트에, 1/5 정도는 냄비에 담고 냄비를 하이라이트에 올려놓은 뒤, 전기포트와 하이라이트를 모두 풀가동시켜 둘이 동시에 끓기 시작하게 하면 된다. 물이 끓으면 전기포트의 물을 냄비 안으로 부어준다. 하이라이트 1개만 풀가동시켰을 때의 화력보다, 하이라이트 1개와 전기포트 1개를 모두 풀가동시켰을 때의 화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물이 더 빨리 끓는 원리다.

하이라이트의 장점은 빨간불이 들어오는 면적 전체가 고르게 가열돼, 부침개 같은 걸 할 때 타는 부분과 설익는 부분이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인덕션은 바닥 면적 전체가 고르게 가열되지 못하고 O자 모양으로만 가열된다.


인덕션을 쓸 땐 인덕션용으로 나온 냄비·후라이팬을 구입해야 한다. 흔히 ‘인덕션 전용’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가스렌지, 하이라이트에서 아무 문제 없이 사용 가능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전용’은 아니고, ‘인덕션에서도 사용 가능한’ 냄비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인덕션용 냄비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기술력이 들어간 냄비인 것은 아니다. 인덕션은 자석에 붙는 재질인 430 스텐만 가열할 수 있기 때문에, 인덕션용 바닥3중 냄비는 바닥에 붙은 원판의 맨 바깥쪽 재질이 430 스텐으로 돼 있고, 인덕션용 통3중 후라이팬은 통3중 구조의 맨 바깥쪽 레이어가 자석이 붙는 430 스텐 재질로 돼 있으며, 인덕션용 알루미늄 후라이팬은 알루미늄 본체의 밑바닥에 430 스텐 재질의 원판이 붙어 있다.

시중에는 일반 알루미늄 냄비·후라이팬을 인덕션에서도 사용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고 광고하는 이른바 ‘디퓨저'(컨버터, 디스크)라는 제품도 판매되고 있다. 이것도 어떤 특별한 기술력이 들어간 제품은 아니고, 그냥 재질이 통째로 430 스텐으로 된 통짜 철판일 뿐이다. 인덕션 위에 디퓨저를 올리고 그 위에 냄비를 올린 채로 인덕션을 켜면 먼저 유도가열로 디퓨저가 달궈지고, 뜨거워진 디퓨저에서 냄비 쪽으로 열이 전도돼 결국 냄비도 뜨거워지게 된다. 그러나 디퓨저는 쓸데없는 물건이다. 디퓨저에 냄비를 올리면 디퓨저와 냄비 사이에 미세한 공기층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데, 공기는 열전도율이 매우 낮은 물질이기 때문에 이렇게 중간에 공기층이 껴 있으면 인덕션으로 가열된 철판의 열이 그 위의 냄비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늦게 끓는다.

그러므로 인덕션을 사용한다면 꼭 인덕션용 냄비·후라이팬을 사서 쓰는 것이 좋다. 흔히 ‘인덕션용’ 냄비라고 하면 휘슬러 등 고급 수입명품 브랜드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은 냄비 바닥에 얇은 430스텐 원판만 하나 붙여 놓으면 인덕션용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덕션용이라고 꼭 그렇게까지 비싸라는 법은 없다. 일례로 네오플램 일라 26cm 수출잔량OEM 후라이팬의 경우 인덕션 사용 가능 버전은 13,700원이고 인덕션 불가 버전은 11,900원으로 인덕션용이 1,800원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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